영국의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이자 철학자인 아이작 뉴턴은 1642년 12월 25일, 영국 동부 링컨셔주 울즈소프에서 태어났습니다.
뉴턴이 태어나기 3개월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뉴턴이 3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재혼하자 그는 외할머니 밑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재혼하여 3명의 아이를 낳았고 의붓아버지가 죽자 다시 돌아왔지만, 10년 가까이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정서적으로 힘들었고 내성적이어서 혼자 시간 보냈습니다.
그래서인지, 뉴턴은 자연스럽게 스스로 문제를 생각하고 해결하는 사고력이 길러졌고,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하여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며 지식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연 현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서 자연을 관찰하고 다양한 사물을 만들어보는 등 창의적인 활동을 즐겼습니다.
이는 훗날 과학 연구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져, 뉴턴이 위대한 과학자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661년 6월 뉴턴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습니다.
당시는 과학혁명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지만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케임브리지대학도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므로, 뉴턴도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우주의 모든 물리적 현상을 운동과 물질로 설명하려는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에 매료되었고, 천체 관측을 통해 지동설을 뒷받침한 갈릴레이의 이론을 접하며 우주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 눈을 떴으며, 그가 접한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은 추후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관측 자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뉴턴은 대학교에서 선배 학자들의 연구를 접하면서도 데카르트, 갈릴레이, 케플러 등의 저서를 읽으며 새로운 사고를 스스로 형성해 나갔는데 특히 빛, 운동, 중력 등에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탐구했습니다.
1665년 뉴턴은 학사학위를 받았고, 그해 여름부터 영국에서는 흑사병이 창궐하여 대학교가 잠정적으로 폐쇄하자,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 2년 동안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뉴턴은 이 시기에 이항정리를 일반화했고 미적분학, 만유인력의 법칙, 빛의 성질 등에 대한 연구에 집중함으로써, 그의 위대한 업적 대부분의 기초를 확립했습니다.
1667년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 뉴턴은 대학교로 돌아와서 연구에 전념하는 교수진에 합류했습니다.
기존의 굴절 망원경은 빛이 굴절하여 발생하는 색수차로 인해 빛이 한 점에 모이지 못해서, 관측하는 별이나 행성의 가장자리가 번져 보이는 문제가 있었는데, 오목한 거울을 이용한 반사 망원경을 뉴턴이 1668년에 고안함으로써 색수차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1669년 뉴턴은 자신의 지도교수였던 ‘아이작 배로’ 교수의 후임으로서, 케임브리지 대학교 수학교수로 임명되어 기하학, 수학, 천문학, 광학을 가르쳤습니다.
1672년 뉴턴은 자신이 개발한 반사 망원경을 왕립학회에 제출하여, 천문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그 해에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왕립학회란,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소통하는 새로운 지식 창출의 장을 과학자들에게 제공하여, 인류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 권위 있는 과학 학회로서 1660년 영국 런던에 설립되었습니다.
1675년 뉴턴은 빛의 성질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1687년 뉴턴은 근대 과학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이정표라고 평가되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를 출판했는데. 흔히 《프린키피아》라고 불립니다.
이 책에서 그는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세 가지 기본 법칙(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인 ‘뉴턴의 운동 법칙’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작용한다는 것을 증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제시하여 고전역학의 기본 틀을 완성했습니다.
특히, 그는 낙하하는 사과부터 태양계의 구조까지 우주의 모든 자연 현상을 수학적으로 설명했고, 행성들의 운동을 계산하여 궤도를 정확히 예측했습니다.
이러한 뉴턴의 법칙들은 이후 200년 이상 물리학 연구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1689년 뉴턴은 영국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짧은 기간이지만 1년 동안 정치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1696년부터 약 30년간 뉴턴은 왕립 조폐국장으로 임명되어, 당시 심각한 사회문제였던 위조지폐를 감별하였고 위조범을 체포하는 데 일조했으며 영국 화폐 시스템 개혁에 크게 기여하면서, 사회 문제 해결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1703년 뉴턴은 왕립 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학회의 발전을 위해 후배 과학자들을 지원하고 육성하는 데 힘쓰며 과학계를 이끌었습니다.
1704년 뉴턴은 빛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보여주는 《광학》을 출판했습니다.
그는 빛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하면서, 더 정확한 설명을 위해 책의 내용을 수정하기도 했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이를 보완하여 개정판을 출판하며, 《광학》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뉴턴은 《광학》에서 빛은 작은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빛의 입자설’을 주장했고, 빛을 분해하고 합성하는 ‘프리즘 실험’으로 알게 된 빛의 성질을 기술했으며, ‘렌즈’를 이용해 빛이 굴절되는 현상을 연구했고, 망원경과 현미경의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광학》은 물리학뿐만 아니라 천문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편, 뉴턴의 지적 호기심은 다양해서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다소 비합리적인 연금술 연구에 많은 시간을 쏟기도 했습니다.
신의 존재를 믿었던 뉴턴은 성경의 암호를 풀고 예언을 해석하려고 하기도 했으며,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신의 존재를 중요하게 고려했습니다.
평생을 독신으로 과학 연구에 몰입했던 뉴턴은 1727년 85세에 세상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습니다.
뉴턴의 몰입이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은 이러합니다.
운동, 변화율, 곡선의 기울기 등을 계산할 때 적용하는 미적분학은 건축물, 교량, 자동차, 비행기 등 다양한 구조물 설계에 활용되고 있습니다.
뉴턴이 연구한 광학은 렌즈, 망원경, 현미경 등 광학 기기 개발에, 그의 역학은 증기 기관 등 다양한 기계의 발명과 산업혁명에 기여했습니다.
뉴턴의 운동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은 고전 물리학의 기초를 다져 현대 물리학, 천문학, 우주 과학 등 다양한 과학 분야의 발전을 이끌었는데, 특히 만유인력의 법칙은 우주 탐사, 인공위성, GPS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현대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스마트폰, 자동차, 비행기 등 다양한 기기들은 뉴턴의 이론을 바탕으로 개발되었으며, 여전히 우리는 뉴턴의 과학적 사고방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