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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윌리엄 셰익스피어

by 0101sky 2024.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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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생애에 대한 자료는 불충분하여 추측과 빈약한 기록으로만 얼추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1564년 4월 26일 영국 중부의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Stratford-upon-Avon) 있는 아름다운 숲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 ‘스트랫퍼드’에서 ‘존 셰익스피어’와 ‘메리 아든’ 부부의 맏아들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는 피혁가공업과 중농(中農)을 겸한 부유한 상인이면서 읍장까지 지낸 유지였고, 당시의 사회적 신분으로서는 중산층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셰익스피어의 소년기는 풍족했으리라고 짐작됩니다.

 

셰익스피어는 주로 성서와 고전을 통해 읽기와 쓰기를 배웠고, 라틴어 격언도 암송하곤 했습니다.

 

11세에 입학한 문법학교에서는 문법, 논리학, 수사학, 문학 등을 배웠는데, 특히 성서와 더불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은 그에게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고, 그리스어도 배웠지만 그리 유창하지는 않았습니다.

 

1577년경부터는 가세가 기울어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집안일을 도와야만 했고, 고등 교육은 전혀 받지 못하였습니다.

 

1582년 18세의 셰익스피어는 여덟 살 연상인 ‘앤 해서웨이’와 결혼해서, 1583년에 딸을 낳고 1585년에 쌍둥이 남매를 낳았으며, 이후의 7~8년간은 명확한 행적은 없지만 고향을 떠나 있었습니다.

 

1580년대 후반 또는 1590년경 셰익스피어는 눈부시게 변한 런던 모습에 매료되어 런던에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1558∼1603)이 통치하던 이 시기의 런던은 농촌 인구가 유입되어 많은 유동인구로 북적거렸으며, 경제가 역동적이었고, 각종 문화 활동과 행사로 활기 넘치는 도시였습니다.

 

특히 대중 여흥을 위해 빈번히 열린 연극은 셰익스피어가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고등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음에도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출신의 동시대의 극작가들보다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심오했고, 언어 구사 능력과 시적 상상력을 타고났으며, 무대 예술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습니다.

 

그런 그가 1590년대 초반에 집필한 《타이터스 안드로니커스》, 《헨리 6세》, 《리처드 3세》 등이 런던 무대에서 상연되었을 때, 특히 《헨리 6세》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동시대 극작가 로버트 그린이 셰익스피어의 낮은 학식을 비꼬며 ‘대학도 안 나온 주제에’, ‘라틴어는 조금밖에 모르고 그리스어는 더욱 모르는 촌놈’이 품격 떨어지는 연극을 양산하고 극장가를 뒤흔들고 있다고 셰익스피어를 비난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1592년 이미 그가 런던에서 유명한 극작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594년부터 셰익스피어는 당시 런던 연극계 양대 산맥 가운데 하나인 궁내부장관 극단(1603년 국왕 극단으로 이름을 바꿈)의 전속 극작가가 되어, 극작에 주력하면서 조연급 배우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는 이 기간을 전후해서 《비너스와 아도니스》(1593)와 《루크리스의 능욕》(1594) 등 장시(長詩) 두 편 발표를 시작으로 시인으로서의 재능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사업적 기질을 물려받았는지 재산 관리에도 능숙하여, 상당한 부동산을 구입했습니다.

 

1610년에는 셰익스피어는 고향에 정착해서 런던을 오고 갔습니다.

 

1606년에서 1607년을 전후하여 몇 편 안 되는 희곡을 썼으나, 1613년 이후에는 그의 창작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여생을 고향에서 보내다가 1616년 4월 23일에 52세의 나이로, 그는 아내와 두 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셰익스피어는 극작가로서 활동한 1590년~1613년까지 사극, 희극, 비극, 희비극 등 연극의 모든 장르를 섭렵하였습니다.

 

그는 ‘4대 비극’으로 대표되는 《햄릿》, 《오셀로》, 《리어 왕》, 《맥베스》와 낭만비극의 걸작인 《로미오와 줄리엣》등의 30편이 넘는 희곡을 집필했고, 소네트(154편 연작)를 비롯한 총 6편의 시를 창작했습니다.

 

이렇게 대략 24년 동안 셰익스피어는 총 40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의 초기작은 고전극이나 선배 극작가의 영향을 받았으나 후기로 갈수록 모방에서 벗어나, 인간을 관찰하는 눈이 선명해지고 자신만의 아름답고 독특한 언어를 사용하여 정교하고 독창적인 색을 입힌 작품을 창조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찬사를 받는 이유는 인간관계에서 생겨나는 문제를 작품의 가장 밑바닥에 깔고, 모순의 복합체인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인간의 본성과 삶에 대에 깊이 있게 통찰하고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함으로써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그가 창조한 특유의 언어와 해학적인 말장난, 은유 같은 문체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햄릿의 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같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숱한 명대사를 남겼고, 그가 작품에서 사용한 신조어가 무려 2천 개에 달할 만큼

언어 구사력이 뛰어나 오늘날의 영어 표현을 풍요롭게 했습니다.

 

연출가이기도 한 셰익스피어는 작품을 쓰고 제작하는 과정에서 연극의 현장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배우들과 함께 대사를 연습하고 연출을 지휘했으므로, 자신이 속한 극장의 구조적 제약을 뛰어넘어 무대를 다양하게 형상화는 솜씨가 무척 탁월했습니다.

 

이렇게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깊은 감동과 영감을 주었으며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어 그가 별세한 지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여전히 연구되고 다양하게 재해석되며 재연되고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대부분 작품이 살아생전에 인기를 누렸던 만큼 눈을 감기 전에 이미 '영국 최고의 극작가'라는 최대의 찬사를 받았고, 후대인들에게는 그의 위대한 예술적 정신에 대해 '대가(Master)'라 칭함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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