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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잔 다르크

by 0101sky 2024.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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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는 1412년 1월 6일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 동레미에서 특별할 것 없는 소작농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글자를 익히지도 못하고 집안일을 하며 양 떼를 돌보던 소녀였습니다.

 

당시의 영국 영토는 지금의 프랑스까지 걸쳐 있어서 영토 분쟁이 잦았고, 또한 두 나라 왕실 간의 복잡한 혼인 관계 때문에 프랑스 왕위 계승을 두고 갈등이 심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가 태어날 무렵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발발한 ‘백년전쟁’(1337년부터 1453년)으로 프랑스는 전 국토가 폐허가 된 상태였습니다.

 

1380년 프랑스 샤를 6세가 왕위에 올랐던 시절 프랑스는 내란으로 더욱 어지러웠습니다. 프랑스 귀족들은 서로 더 많은 영토를 갖기 위해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려고 했는데, 그중 부르고뉴파와 알마냑파가 가장 두드러진 세력이었습니다.

 

훗날, 부르고뉴파는 영국과 손을 잡고 프랑스 왕실과 대립하였으며, 알마냑파는 영국왕조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어 영국 왕실과 대립하였습니다.

 

이렇게 프랑스가 내란으로 혼란한 시기, 영국 헨리 5세는 1413년 부르고뉴파 세력과 결탁했고, 1415년 노르망디(영국과 근접한 프랑스 북서부지방)를 침략한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의 여러 도시를 빼앗았습니다.

 

영국 헨리 5세는 1420년 ‘트루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프랑스 샤를 6세의 딸과 혼인하여

정식으로 프랑스 왕위에 올라, 프랑스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확대하였습니다.

 

그러나, 1422년 영국의 헨리 5세와 프랑스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갈등이 일었습니다.

 

영국은 트루아조약을 근거로, 헨리 5세와 샤를 6세의 딸 사이에서 낳은 나이 어린 헨리 6세를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이라 주장한 반면, 이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프랑스 알마냑파 귀족들은 샤를 6세의 왕세자를 샤를 7세로서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이에, 영국과 부르고뉴 연합 세력은 파리를 비롯해 프랑스 영토를 점령하기 시작해서, 1428년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까지 포위하였으며 샤를 7세는 궁지에 몰리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 동레미에서 태어난 잔 다르크는 10대 후반으로 들어서고 있었고, 전쟁의 여파는 잔 다르크가 살던 동레미 마을에도 들이닥쳐, 영국과 부르고뉴 연합군이 습격해서 약탈하고 불을 지르는 일들이 빈번했습니다.

 

한편, 어렸을 때부터 신앙이 두터웠던 그녀는 13세 때부터 신의 음성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16세 때는 대천사 미카엘, 성 카타리나, 성 마르가리타의 모습과 함께 "프랑스를 구하라"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거절했으나 계속되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할 것을 결심한 잔 다르크는 1428년 12월, 자신이 받은 계시를 따르기 위해 성채의 사령관에게 갔습니다.

 

성채의 사령관은 처음엔 잔 다르크를 내쫓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잔 다르크를 샤를 7세에게 보냈습니다.

 

이때 잔 다르크는 남장을 하고 머리를 짧게 깎은 채였습니다. 샤를 7세는 그녀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신하들 속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었지만 잔은 그에게 곧바로 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늘의 군주께서 나에게 맡긴 소임이 2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오를레앙을 해방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왕을 랭스(전통적으로 왕위 즉위식을 올리던 지역)로 모시고 가 기름부음을 받고 즉위하게 하는 것입니다.”

 

잔은 그녀에게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판단한 샤를 7세에게서 받은 군사를 이끌었습니다. 잔 다르크는 선두에 앞장서서 군을 통솔하여 1429년 5월 오를레앙에서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그녀는 오를레앙의 해방은 신이 보낸 사람이 자신이란 표식을 보여준다고 주장했습니다.

 

잔 다르크는 이후 대부분의 전투에서도 순백의 갑옷과 흰 옷을 입고 선두에 서서 거침없이 지휘하며 영국군을 패퇴시켰습니다. 그녀는 적이 공격해 올 때는 사람 죽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깃발을 들었고,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적은 없었습니다.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을 되찾고 곧바로, 장관과 사령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랭스로 진격했으며, 그녀가 앞장선 군대는 가는 길에 영국에 넘어갔던 지역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랭스에 입성 후, 샤를 7세는 이곳 성당에서 전통적인 전례에 따라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함으로써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습니다.

 

즉위 후 샤를 7세는 안이해져, 신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소명인 파리 탈환을 통해 영국군을 완전히 축출하자고 주장하는 잔 다르크의 말을 무시하고, 부르고뉴파를 통해 영국과 외교적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이 와중에, 그녀는 파리를 점령하려다 부상을 입었고 영국이 점령한 도시들을 탈환하는 전투에 나섰습니다.

 

대관식이 있고 나서 1년 후 영국군은 프랑스를 재공격하였고, 잔 다르크는 대략 200명의 소수 병력만을 이끌고 다시 왕과 프랑스를 위해 싸웠습니다.

 

결국 잔 다르크는 1430년 5월 콩피에뉴 전투에서 부르고뉴파 군사에게 포로로 사로잡혔고, 샤를 7세에게서 정치적인 용도는 사라져 버린 그녀는 왕실의 무관심 속에서 부르고뉴파에 의해 몸값을 받고 영국에 넘겨졌습니다.

 

그 후, 그녀는 신성한 신의 중계자인 사제를 거치지 않고는 신의 계시를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영국과 부르고뉴의 주도하에 이단으로 몰려 종교재판에 회부됩니다.

 

열아홉 살의 잔 다르크는 당대 논리로 무장한 수십 명의 성직자, 학자들과 맞서야 했습니다.

 

재판장은 주로 잔 다르크가 들은 음성들, ‘표식’을 통해 보장된 소명, 성인들과 가졌던 교류, 왕과 나눈 비밀, 예언, 남장을 했던 것, 부모를 떠난 것, 선동과 잔인함, 우상 숭배, 교회에 승복하지 않는 이단성 등을 심문하며 잔 다르크를 마녀들의 마술과 우상을 숭배하며, 악마와 교류하고, 정상 생활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는 여자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녀는 일곱 번의 재판을 거쳐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경건한 태도로 죽음을 받아들였으며, 1431년 5월 30일, 결국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백년전쟁은 잔의 사후에도 22년간 더 진행되었으며, 샤를 7세는 잔 다르크가 죽은 25년이 지나서야 그녀의 명예복권을 위해 움직였습니다.

 

교황청은 프랑스 왕실의 요청을 받아들여 1456년에 잔 다르크에 대한 심사를 재개하여 그녀가 무죄라고 최종 판결을 내렸고, 그녀를 순교자로 선언하였습니다.

 

수백 년 후인 1920년 가톨릭 교회에서는 그녀를 성녀로 시성(諡聖)하였고, 루앙의 화형장터에는 잔에게 봉헌된 성당이 지어졌으며, 특히 화형이 집행된 바로 그 지점에는 대형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국민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싸우고 희생한 그녀의 용기와 신앙심을 기억하며

잔 다르크를 '프랑스의 영웅'이라 인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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