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적인 발명가·물리학자·전기공학자인 니콜라 테슬라는 1856년 7월 10일에 현재는 크로아티아에 속하는 스밀랸(Smiljan)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발칸 반도는 여러 민족과 국가 간의 갈등으로 변화를 겪던 시기였던 만큼, 다양한 민족이 혼재되어 있었고 종교 또는 생업 등의 이유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세르비아인이었던 테슬라의 부모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던 스밀랸에 거주하고 있을 때 그를 낳았습니다.
테슬라의 출생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유고슬라비아 등 다양한 국가의 지배를 받으며 국경선이나 행정 구역이 여러 번 바뀌었기 때문에, 그의 국적과 민족성은 복잡한 측면이 있지만, 그는 스스로를 세르비아인으로 여기며 자부심을 가지고 자랐습니다.
테슬라의 아버지는 세르비아 정교회의 사제로서 지성과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고, 발명가이자 기계 기술자였던 그의 어머니는 다양한 기계를 직접 만들고 수리하는 등 손재주가 좋았습니다.
테슬라의 부모님은 그에게 지식뿐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주었는데, 특히 어머니는 테슬라에게 기계를 만들고 수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며 과학과 발명에 남다른 그의 재능을 키워주었습니다.
테슬라가 살았던 시대와 환경을 고려할 때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그가 모국어인 세르비아어를 비롯하여 영어, 불어, 독어, 이탈리아어 등 다양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는데, 그의 뛰어난 암기력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학업에 있어서 테슬라는 복잡한 수학 문제를 쉽게 풀어내는 능력을 보였고,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능력이 뛰어났는데, 특히 과학 분야에서 학교교육과 함께 다양한 분야의 책을 탐독하며 독학으로 폭넓은 지식을 쌓았습니다.
일부 과장된 측면이 있을 수 있지만, 복잡한 수식과 설계도를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설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실험을 하기 전에 이미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던 경우도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1875년경 테슬라는 오스트리아 그라츠 기술대학(현재 그라츠 공과대학교)에 입학하여 전기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쌓으며 전기공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지만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중퇴하고, 후에 프라하대학에 입학했다가 딱하게도 중퇴를 반복했는데, 이것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과학과 기술에 대한 그의 열정과 호기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테슬라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대학 성적과 엔지니어를 능가하는 지식 덕분에 1881년 부다페스트 전화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는데, 그곳에서 전기 시스템을 다루며 실무를 읽히던 중 직류 시스템의 한계를 느꼈고, 교류 시스템 개발의 기반이 되는 회전 자기장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1882년 테슬라는 파리로 건너가 콘티넨털 에디슨 회사에서 전기 장비를 설계하고 직류 시스템을 개선하는 업무를 맡아서 일하면서도, 당시 주류였던 직류 시스템에 비해 장거리 송전에 효율적이고 전압 변환도 쉽게 할 수 있는 교류 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병행하며 지식을 쌓았습니다.
1884년 이러한 테슬라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에디슨은 그를 미국으로 초청하여 그에게 거액을 약속하며, 단순히 교류 시스템이 아니라 싼값에 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전력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에디슨 연구소에서 일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로, 테슬라는 에디슨에게 직류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고 새로 개발한 효율적인 교류 전력 시스템을 제안했으나, 직류 전기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진 에디슨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보상도 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전기 시스템의 미래를 놓고 두 천재 과학자가 충돌하면서 1885년 서로 결별하였으며, 테슬라는 1886년 ‘테슬라 전기 회사’를 설립하고 교류 시스템 연구 개발에 더욱 집중했습니다.
그러던 중 1888년 테슬라는 미국전기학회에서 교류 시스템에 대한 강연을 통해 많은 엔지니어와 과학자들에게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때 이미 교류 시스템에 관심이 있었던 웨스팅하우스 전기 회사는 테슬라의 강연을 들은 후, 에디슨의 직류 시스템보다 우위에서 전력 시장을 선점하려는 포부를 가지고 그의 혁신적인 교류 시스템에 대한 특허 중 일부를 구매하며 협력 관계를 맺었습니다.
테슬라 전기회사는 교류 시스템에 대한 연구 개발에 집중하며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웨스팅하우스는 그의 특허를 기반으로 실제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등 이를 사업화하여 전력 시장을 개척하는데 힘썼습니다.
당시 급성장하는 전기 산업 시장에서, 에디슨과 웨스팅하우스의 '전류 전쟁'은 치열했는데, 양측은 서로의 기술을 비난하고 상대방의 기술이 위험하다는 것을 대중에게 알렸고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각자의 기술을 이용하여 발전소, 송전 시스템 등을 구축했으며 교류와 직류의 안전성과 효율성을 비교하기 위한 공개 시연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마침내 테슬라와 웨스팅하우스의 노력으로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서 에디슨을 제치고 박람회장 전체에 성공적으로 전력을 공급하게 됐는데, 이것은 교류 시스템의 안전성과 효율성을 대중에게 보여줌으로써 기술적 우위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투자를 유치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편 테슬라는 웨스팅하우스와 연대하면서도 자신의 아이디어를 보호하고 웨스팅하우스와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1880년대 후반부터 독자적으로 다상 교류 시스템, 유도 모터, 테슬라 코일 등 다양한 교류 시스템 관련 특허를 출원하고 등록해 왔습니다.
테슬라는 현대 무선 통신의 기초가 되는, 무선으로 전신 신호를 보내는 시스템에 대한 특허를 획득 후 1898년 무선 조종 보트를 시연함으로써 무선 통신 기술의 가능성을 선보여 큰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무선 통신’과 ‘무선 전력 전송’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그의 야심 찬 계획을 위해, 1899년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거행한 대규모 실험과 1901년 롱 아일랜드에서 진행한 워든클리프 타워 건설은 허탈하게도 자금 부족과 기술적인 한계 등의 요인으로 인해 중단되었습니다.
테슬라는 현대 전력 시스템의 표준으로 자리매김하고 다양한 산업 분야의 발전을 이끄는데 크게 기여한 ‘교류 시스템’ 개발에 기여한 공로로, 1917년에 미국 전기공학자협회(AIEE)로부터 에디슨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테슬라는 미래 지향적인 아이디어를 일기장에 상세히 기록하고 연구하였지만 시대를 앞서 너무나 혁신적이었던 나머지 투자자를 찾지 못해 재정난에 시달리며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갔고,
평생 독신으로 살며 발명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던 테슬라는 1943년 뉴욕의 호텔 방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테슬라의 죽음은 세상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테슬라의 일기장은 후대 연구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고 그의 천재성은 재평가되었습니다.
1961년 국제순수 및 응용물리학 연맹(IUPAP)에서는 자기장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테슬라(Tesla, T)를 공식 채택하여, 자기장 연구의 선구자이자 전기 공학 분야의 발전에 공헌한 그에게 존경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테슬라는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세르비아인이지만 미국에서 활동하며 많은 발명을 했기 때문에 미국,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세 나라 모두 국민적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테슬라를 자국의 위인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미국 전기전자학회(IEEE)는 테슬라 사후 30년이 지난 1973년에 그를 기리는 'IEEE 니콜라 테슬라 어워드'를 제정했고, 크로아티아는 테슬라 탄생 150주년인 2006년을 ‘니콜라 테슬라의 해’로 지정했으며, 세르비아는 2006년 3월에 국제공항 이름을 니콜라 테슬라 공항으로 변경했습니다.
또 일론 머스크의 전기 자동차 제조 회사인 '테슬라 모터스'는 혁신과 변화의 정신을 가진 니콜라 테슬라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