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비관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1788년 2월 22일, 폴란드 단치히(현재 폴란드 그단스크)의 부유한 가정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단치히는 역사적으로 독일, 프로이센 등 다양한 국가의 지배를 받았는데, 쇼펜하우어 생애에는 1793년 2차 폴란드 분할 이후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되었다가 이후 여러 차례 소속이 바뀌었습니다.
프로이센 왕국은 독일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했고, 당시 단치히는 독일어를 사용, 쇼펜하우어도 독일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독일어로 저술 활동하면서, 그의 삶과 사상이 독일 문화와 철학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철학자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1793년 쇼펜하우어가 5살 되던 해, 단치히가 프로이센에 합병되자 그의 가족은 안전과 미래를 위해, 역사적으로 자치권을 누리고 상업과 문화가 발달한 도시인 함부르크로 이사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아버지는 유럽 전역을 아우르는 무역망을 구축하고 큰 부를 축적한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우울한 성격에 감정 표현이 서툴렀고 규율을 엄격히 따지고 권위적이어서, 그에게 반발심을 심어주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어머니는 사회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사고를 가졌고 사교적이었으며 당대 인정받는 작가였으나, 내성적인 그와는 성격이 너무 달라 둘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감정은 쌓여만 갔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어린 시절부터 독서와 학문에 깊은 관심을 보였지만, 11세가 되던 1799년에 아버지의 권유로 상인 양성기관에 입학하여 약 4년간 공부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상인이 되기로 결심했지만 철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내적인 갈등을 빚었고, 철학공부를 병행했습니다.
1803년 쇼펜하우어 가족은 수개월 동안 유럽 여행을 떠났는데, 이는 아들이 상인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가
상업 현장 학습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철학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 중에도 사색을 즐겼고,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을 접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동양 철학에 대한 관심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후에 그가 불교와 힌두교의 사상을 연구하며, 삶의 고통과 해탈에 대한 독자적인 철학을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805년 쇼펜하우어가 17세 되던 해 그의 아버지가 자살을 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사교적이고 화려한 삶을 추구하는 그의 어머니는 막대한 유산을 가지고 여동생과 함께 바이마르로 이사했으며 철학적인 성향이 강하고 고독을 즐겼던 그는 독립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어머니의 이기적이고 방탕한 생활은, 쇼펜하우어에게 큰 상처가 됐으며 삶에 대한 회의감을 심화시켰고 인간관계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독하고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인간은 욕망과 고통의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는 비관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게 됐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유산 정리 등의 문제로 함부르크에 머물며 상인 수업을 받았지만 여전히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함부르크를 떠나 고타와 바이마르의 김나지움에서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대학 진학을 위한 학문적 기초를 다졌습니다.
김나지움(Gymnasium)은 독일어권 국가에서 운영되는 교육기관으로, 인문학, 자연과학 등의 지식 습득을 넘어 비판적 사고 능력과 창의성을 키워줌으로써, 대학 진학을 위한 심화 교육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는 곳입니다.
쇼펜하우어는 김나지움을 마치고, 안정적인 직업을 위해 1809년에 괴팅겐 대학교 의학과에 입학했지만 철학으로 전과했고, 철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심도 있게 연구했습니다.
그는 괴팅겐 대학교에서 회의적인 철학자 슐체 교수에게 철학을 배우면서 칸트와 플라톤의 사상을 접하고, 두 철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독자적으로 해석해 자신만의 철학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나아가 그는 박사 학위 논문으로 "충족 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라는 주제로 연구한 논문으로 예나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쇼펜하우어가 괴팅겐 대학교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논문을 작성한 후 예나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당시의 대학 시스템이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반드시 해당 대학교에서 모든 과정을 이수해야 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쇼펜하우어가 제출한 논문의 주제가 예나 대학교의 학문 분야와 더욱 부합했거나 개인적인 사정 등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충족 이유율은 모든 사건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철학적 원리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이 논문에서 충족 이유율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을 제시하며 독자적인 입지를 다졌고, 이 논문은 철학(인식론) 분야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학위 취득 후 쇼펜하우어는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던 바이마르로 이사했는데,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활발한 지적 활동을 하면서 그의 철학적 사상이 더욱 성숙해졌습니다.
내성적이며 고독을 좋아하는 쇼펜하우어였지만, 지적 호기심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자신의 사상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토론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특히 당대 최고의 문호이자 자연과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던 괴테와는 서로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다양한 철학적 주제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였습니다.
1818년 쇼펜하우어는 수년 동안 집필한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의 초고를 완성하여 1819년에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그의 핵심 철학을 담고 있는 대표작으로, 세계를 의지와 표상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거나 갖고 싶어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고, 의지 때문에 존재하고 의지라는 힘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고 살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하고자 하는 의지가 때로는, 우리가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없거나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없을 때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줄 수 있으므로,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의지를 조절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마치 카메라가 세상을 사진으로 담아내듯이, 우리의 뇌가 세상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해서 '표상'이라는 그림으로 담아내므로, 사람마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보고 다르게 느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 눈에 보이는 표상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진실을 완벽하게 보여주지 않고 속이는 부분도 있으므로, 끊임없이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음악 미술 등 예술 작품을 통해 감정을 더 깊이 느끼고 세상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자연 속에서 고요함을 찾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낌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정화하고 표상 너머에 있는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1820년, 쇼펜하우어는 헤겔을 중심으로 절대정신 철학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베를린 대학교에서 강의를 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헤겔의 철학과는 전혀 다른 독창적인 본인 철학의 우수성을 증명하고 싶어 한 나머지 헤겔과 같은 시간대에 강의를 신청했습니다.
당시 헤겔의 철학은 시대 흐름과 맞물려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던 반면,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다소 어렵고 난해했으며 비판적이고 반항적인 그의 성격으로 동료 교수들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쇼펜하우어는 몇 학기 만에 강의를 중단해야 했습니다.
때문에 쇼펜하우어는 대학이 진정한 학문 연구를 방해하는 곳이라면서 대학의 제도와 권위에 대한 비판을 끊임없이 제기했고, 독립적인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로 쇼펜하우어는 콜레라를 피해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30여 년 동안 은둔하여, 집필과 자연과학 연구에만 몰두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살던 19세기는 공중위생 시설이 열악하고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콜레라가 인류를 위협했던 시기였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콜레라에 대한 불안과 공포 속에 살면서, 삶의 무상함과 고통에 대한 그의 비관적인 세계관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대부분의 시간을 철학, 문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탐독하고 깊이 사색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는데, 동양 철학, 특히 인도의 힌두교 철학의 한 분파인 베단타 철학과 불교에 대한 연구를 심도 있게 진행했습니다.
그는 동양 철학에서 자신의 철학과 유사한 부분을 발견하고,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 사이의 연결점을 탐구했습니다.
이 은둔의 시기에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내용을 더욱 심화하고 보완하여 자신의 철학을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고, 비판에 대한 답변을 제시한 <보충론>과,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여록과 보유> 등을 출판했습니다.
이렇게 평생을 독신으로 철학 연구에 몰두하며 고독하게 살면서 삶의 고통과 무의미함에 대해 깊이 탐구했으며, 해탈을 통해 모든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쇼펜하우어는 1860년 9월 21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폐질환이나 심혈관 질환 등의 노환으로 인한 호흡부전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철학은 비록 당대에는 큰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재평가되었고 니체, 프로이트 등 후대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현대인들에게 깊은 공감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며 다시금 주목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