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데레사는 1910년 8월 27일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알바니아어로 아녜저 곤제 보야지우(Anjezë Gonxhe Bojaxhiu)이다. 오스만 제국 치하의 위스퀴프(اسکوب / Üsküb, 현 북마케도니아 스코페)에서 알바니아인이었던 니콜러 보야지우(Nikollë Bojaxhiu)와 드라나필레 보야지우(Dranafile Bojaxhiu) 부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가족 관계로는 언니 아가(Aga)와 오빠 라자(L, azar)가 있었다.
그녀의 집안은 영국의 영향을 받아 현지에서 소수 종교였던 가톨릭을 믿고 있었다. 특히 어머니 드라나필레가 독실한 신자였다고 한다. 정치인이던 아버지 니콜러는 1919년 시 의원으로 정치 행사에 참석한 후 독살되었다. 1차 세계 대전 직후, 1910년대의 혼란스러웠던 당대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비극적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더욱 서로를 아끼게 되었으며 결속력이 강해졌다고 한다.
마더 데레사는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으나 우등생이었고, 가톨릭 성당에서 성가대원으로 활동하며, 성장한 후에는 가톨릭 청년 단체에서 활동했다. "12세 때, 나는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일이 소명임을 알았습니다. 나는 선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라고 그녀는 말한 적이 있다.
1928년 아일랜드 더블린에 가서 성모 수녀회에 입회하고, 인도 제국으로 떠나 인도의 로게토 성모 수녀회에서 수녀가 되기 위해 수련을 받는다.
9년 후, 1937년 로게토 성모 수녀회의 수녀로서 종신 서원을 한다. 직후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교사로 일한다.
1946년, 대피소를 떠나는 기차 안에서 약자들을 도우며 살라는 소명을 받는다.
1948년에 수도복을 벗고 흰 사리를 입고 수녀회를 떠나 기초 간호학을 속성 과정으로 수료한 후,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집안으로 불러와 먹을 것을 주고 돌보아 주는 일을 시작한다. 마더 데레사의 봉사 방향성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었다. 그해에 데레사 수녀는 인도 시민권을 요청하는데, 곧 평생 인도 시민권자로서 살 수 있게 된다.
1949년부터 성 마리아 학교의 제자들이 데레사 수녀를 따라 모여들어, 1950년에 인도 첼커타에서 ‘사랑의 선교회’를 창설했다. 이 선교회는 활동하며 관상하는 선교회이다.
1952년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임종자의 집'을 연다. 사랑의 선교회는 점점 더 커져갔고, 모인 기부금으로 선교회 지부로 쓸 집을 살 수 있었다.
이 수도원은 사랑의 선교회 본원으로 쓰이게 되고, 같은 거리의 임종의 집에서 죽은 사람들의 아이들을 포함하는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도 설립한다.
사랑의 선교회는 1957년에 나환자를 돌보기 시작했다. 이들의 활동은 나환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나, 전염을 우려한 사람들의 반대로 이동 병실을 우선적으로 만들었다가 후에 시 외곽에 나환자들의 자립을 위한 재활 센터를 설립한다.
1990년 4월의 통계에 의하면, 이 선교회는 미국인 출신 57명을 포함해서 약 1천9백 명의 허원한 수녀들이 98개국의 약 4백20개 빈민원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1963년 마더 데레사는 호주계 앤드루 트라버스 볼(Andrew Travers Ball) 신부와 함께 사랑의 선교형제회 (Missionary Brothets of Charity)를 창설했다.
1969년 마더 데레사의 사업에 참여하려는 평신도들의 점증하는 관심에 부응하여, 마더 데레사의 공동봉사자회가 범기독교적으로 비공식적으로 조직되어 교황 바오로 6세의 인가를 받았다.
이렇게,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사랑의 선교회'의 새로운 분원들이 문을 열어 활동하게 된다. 이 선교회의 회원들은 가난, 순결 및 순명을 서약하지만, 가난에 대한 서원은 다른 어느 수도회보다 더 엄격한데, 이는 마더 데레사가 설명했듯이, '가난한 이들을 사랑할 수 있고 알 수 있으려면, 우리 스스로 가난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난한 이들 중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성심성의껏 봉사한다는 네 번째 서원을 한다.
그녀는 의료 기관도 운영했는데 '자비의 집' 봉사 활동을 했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데레사 수녀는 자비의 집을 현대적인 의료 시설로 바꾸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단지 죽어가는 이들을 방치하는 수준의 원시적인 시설 관리만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현지에 지어지는 의료 기관이 극도로 빈약하여 다른 병원보다 사망률이 아주 높았다고 한다. 빈민 모두를 최상의 시설과 인력으로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쳐도, 세계로부터 흘러오는 막대한 지원금으로, 기자재가 충분히 갖춰진 시설에서 치료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시설을 그냥 이곳저곳 늘리는 데에만 집중한 면모도 선교에만 치중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마더 데레사는 1979년 12월 10일 노벨 평화상을 받았을 때, 헐벗고 굶주리고 집 없는 이들, 눈먼 이들, 나환자들, 사회에서 쓸모없고 사랑받지 못하며 관심 밖이라고 느끼는 모든 이들의
이름으로 그것을 수상한다 했으며 수상 축하연에 사용될 돈을 빈민 구제 기금으로 써달라고 요청한 일화가 있다.
노벨 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그녀는 '낙태는 인류를 파멸시키는 최대의 무기'
라고 말했다. 강간당한 피해 여성들에게 낙태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말했다. 가톨릭은 인간 생명 존중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모든 생명 훼손 행위에 반대한다. 다만 산모가 죽게 된다거나 하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서 태아가 유산될 '가능성'이 있지만 산모를 확실히 살릴 수 있다는 전제하에 태아의 사망을 의도하지 않는 치료 방식 정도만 용인한다.
데레사 수녀원장은 무책임하게 출산만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끄는 사랑의 선교회는 말로만 떠드는 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의료 기관과 고아원 등의 시설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녀는 "키우지 못할 아이가 있으면 낙태하지 말고 나에게 보내 달라. 내가 키우겠다."라고 했다.
그녀는 에이즈 환자들과도 함께 일을 시작했다. 그녀는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에 에이즈환자를 위한 피난처를 개방했다.
마더 데레사와 그녀의 사업은 1968년에 비로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때 유명한 영국의 저널리스트이며 사회비평가인 맬컴머저리쥐(Malcolm Muㆍ ggeridge)는 그녀에 관한 TV 다큐메타리, 「하느님을 위한 아름다운 그 무엇」을 제작했다.
마더 데레사는 노벨 평화상과 요한 23세 교황의 평화상 외에도, 1973년에 템플톤상, 1971년의 J. F. 케네디 국제상, 1979년 의박애ㆍ평화 및 형제애에 대한 30만 달러의 발잔상과 인도최고의 상 파드마슈리 메달을 포함해서 수십 개의 상과 명예학위를 받았다.
한편, 그녀는 인도로 떠난 이후 수녀회의 사도직 활동에 전념하며 평생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어머니 드라나필레가 임종할 때는 알바니아로 돌아가려 했으나 정부에서 입국 허가를 거절했다. 그녀는 인도의 콜카타에서 헌신적인 빈민 구제 활동을 하여 살아있을 때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고, 노벨평화상을 받은 다음 해인 1980년에는 인도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시민 훈장인 바라트 라트나(Bharat Ratna)를 받았다.
1982년 이스라엘 군대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근절하기 위해 레바논의 베이루트를 포위했을 때, 마더 데레사는 동 베이루트에 있는 양로원과 스프링스쿨이 수녀 공동체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불구가 된 어린이 37명을 즉시 피난시켜 달라는 요청에 주저 없이 당시 어린이들을 대피시켰다.
1991년에는 걸프 전쟁 중지를 호소했고, 실제로 조지 H. W. 부시와 사담 후세인은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다. 물론 데레사 수녀의 요청만으로 전쟁이 멈춘 것은 아니겠지만 세계 평화를 위한 한 노력이 빛을 발한 예라고 할 수 있다.
1991년에서 1993년 사이에는 심장마비로 2번의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계속하여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평화와 나눔을 호소했다. 처음 심장마비 시에는 자신이 받을 의료적 행위를 자신이 돌보는 가난한 이들은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으나, 2번째 발작 이후, 저명인사의 죽음으로 인한 비난을 두려워한 인도 정부의 지속적인 요구와 교황의 요청으로 마지못해 인도에서 알아주는 최고의 요양 시설에서 반강제적으로 수술을 받았다.
말년에는 말라리아에 감염되었는데, 이것이 폐까지 침범하였다. 선교회에서 죽고 싶다고 말해 선교회로 되돌아왔고, 1997년 9월 5일에 향년 87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장례식은 9월 13일에 국장으로 거행되었는데 시신은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의 시신을 운구했던 포가(砲架)로 운구되어 인도 정부가 나타낼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와 애도를 표했다. 유해는 생전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데레사 수녀의 집에 안장되었으며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평생 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숙인 자세로 일 해왔기 때문에, 고령이 된 후에는 허리가 펴지지 않았고, 세계를 돌아다닐 때는 한쪽 귀가 멀고 심장이 약해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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