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퀴리’는 우리나라에 ‘퀴리 부인’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1867년 11월 7일, 교육자 부부의 다섯 아이들 중 막내로 태어난다.
어머니는 바르샤바에서 손꼽히는 명문 학교의 교장이었는데, 폐결핵을 앓게 되면서부터 집에서 요양하게 된다. 아버지는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감이었는데, 당시 러시아 치하에서 교사직을 박탈당하기에 이르렀고 설상가상으로 큰돈을 사기당하면서 생활이 급격하게 어려워진다.
급기야, 첫째 언니 조피아는 병을 얻어 12살의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하며, 결핵으로 오랜 투병 생활을 하던 어머니마저 마리아가 10살 때 세상을 떠나게 된다.
마리 퀴리는 공부는 잘했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돈을 모으기 위해 부유한 집안의 가정교사로 일을 한다. 당시 폴란드에서는 여성이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사가 꿈인 그녀는 프랑스 유학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역시 의사를 꿈꾸던 둘째 언니 브로냐의 프랑스 유학길에 먼저 도움을 주고 나서, 그녀는 23세 되던 해에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먼저 프랑스로 유학 간 언니는 내과 의사가 되었고, 성공한 의사이자 사업가인 남편과 결혼하였는데, 뒷날 마리는 형부에게 많은 연구비를 지원받기도 한다.
마리퀴리는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하여 물리학과 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프랑스인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를 만나 1895년에 소박한 결혼식을 올리면서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으며, 두 명의 자녀 이렌, 에브를 둔다.
연구비도 없었던 마리는 소르본 대학의 어둡고 먼지 나는 비좁은 창고에 실험실을 차리고, 남편 피에르의 측정 기구를 사용한다.
마리는 독일 은광에서 발견된 ‘피치블렌드’(현재 학명은 '우라니나이트(Uraninite)')라는 검은색 광물에 주목했고, 피에르와의 공동연구에 들어간다. 1898년 피치블렌드라는 광물에서 우라늄을 얻는 도중,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하여 방사능을 연구에 결실을 맺는다. 이렇게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한 업적으로 두 사람은 1903년 노벨물리학상을 받는다.
퀴리 부부가 발견한 라듐은 어두운 곳에서 푸른 빛을 발산하며 초창기 야광도료로 사용되며,
시곗바늘, 치약, 초콜릿, 화장품 등에 활용된다. 의사들은 이 새로운 원소의 정교한 사용법이나 투사량을 모른 채 아무 환자에게나 라듐광선을 쏘여주었다. 방사능이 함유된 붕대, 솜, 머드, 입욕제, 상처에 바르는 연고 등에도 활용된다. 급기야 식수에도 라듐을 넣었고, 여성용 실크 스타킹에도 라듐이 첨가하여 다리가 매력적으로 빛나보이게 한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라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궤양, 종양 등이 발생하는 환자들이 발생하므로, 그 위험성이 알려지며 시장에서 사장되어 간다.
자신의 연구결과가 세상에 이런 악영향을 낳았다는 것을 알고서부터, 마리 퀴리는 죽는 날까지 큰 죄책감을 가졌다고 한다.
오늘날, 방사능은 원자폭탄과 같은 나쁜 용도로도 쓰이기도 하지만, 의학 분야에서는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법으로, 영상의학, 문화재보존, 식물 품종개량 등 인간에게 이로운 용도로도 활용되고 있다.
한편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지 몇 해 되지 않아, 비가 내리던 1906년 4월 19일, 그녀의 남편 피에르가 마차 바퀴에 깔려 만 46세로 사망한다. 피에르를 부검한 의사들은 장기간의 방사선 노출로, 마차 사고가 아니었더라도 오래 살지는 못할 몸상태였다고 전한다.
남편의 사고로 인해, 마리는 그의 뒤를 이어 소르본 대학교에서 후임교수가 되었는데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학교수’이다. 대학교수가 된 그녀는 방사능 연수에 매진한 끝에 1910년 금속 라듐을 분리하는 데 성공하고, 1911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다. 이렇게 마리 퀴리는 성별을 불문하고 노벨상을 2회 수상한 최초의 인물이 된다. 더불어,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이자, 역사상 유일하게 서로 다른 과학 분야에서 수상한 인물이 된다.
마리 퀴리, 그녀는 책임감심을 갖고 있는 선량한 과학자였음이 분명하다. 특히, 1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한 것을 보아, 퀴리의 성품을 한층 더 깊게 엿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마리 퀴리는 연구실에 비축되어 있는 라듐이 악용될 우려를 막고자, 위험을 무릎 쓰고 직접 수송하여 보르도에 있는 은행 금고로 옮겼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도시의 큰 병원에서나 찍을 수 있었던 X-ray(라듐 방사선) 사진을, 부상병들의 신속한 치료를 위해 건강이 악화된 몸을 이끌고 모금활동으로 자금을 모아, X-ray(라듐 방사선) 장비와 암실 장비가 붙어 있는 차량을 개발한다.
그녀는 이 차량을 총 20대 만들어, 150명의 여성 자원봉사자들에게 사용법을 가르쳐 인력을 충당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중 한 대를 골라 직접 부상병들을 진단하기 위해 딸과 함께 전장을 누빈다. 이때 부상병들을 진단하여 체내에 박힌 파편을 찾아내고 수많은 생명을 살렸지만, 정작 마리는 X선에 과다하게 노출되어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고 전해진다.
1923년에 프랑스 의학 아카데미는 마리를 회원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개최된 다수의 강연, 회의에 참석하고 수많은 상을 받는다. 특히 1925년에는, 1차 대전 후 독립한
모국 폴란드를 방문하는 기쁨을 갖기도 한다.
말년의 마리는 계속된 방사능 연구 탓에 건강이 악화되어, 방사선 피폭에 의한 재생 불량성 빈혈 등으로 몹시 고생한다. 이때 당시 의사들은 "라듐은 하나의 원소이며, 모든 사람들의 것."이라며 백만장자가 될 수 있는 특허를 포기한 마리의 대의를 존중하여 진료비를 챙기지 않는다.
요양원을 전전하던 마리 퀴리는 1934년 7월 4일 향년 66세로 사망한다. 당시 평균 수명보다 오래 살았다지만, 죽기 직전에는 여러 생리 기능이 완전히 망가져서 인체의 발열 기능마저 정지할 정도였다.
사후 61년이 지난 1995년 4월 20일, "우리 민족의 가장 순수한 대표자"로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팡테옹에 남편과 같이 이장된다. 마리는 유명인의 아내로서가 아닌, 자신의 업적으로 팡테옹에 묻힌 최초의 여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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