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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레오나르도 다 빈치

by 0101sky 2024.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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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산골 마을, 빈치 Vinci (피렌체에서 30여 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피에로 다 빈치(Piero da Vinci)는 법률가를 다수 배출한 지주 가문 출신이며 직업은 공증인이었고, 어머니 카타리나는 사회적 신분이 낮았고 지참금을 낼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집안 출신의 시골처녀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한 친부, 친모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어머니와 함께 자랐습니다.

 

한편, 결혼한 아버지가 부인 알비에라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하자 다빈치는 본가에 들어가게 되었고, 아버지는 한차례 더 재혼하였으나, 두 번째 부인 역시 첫 번째 부인처럼 자식 없이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로도 아버지 피에로는 두 차례 더 재혼하였고, 이때 아이를 많이 낳은 덕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두 12명이나 되는 이복형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서자라는 이유 때문에 이복형제들과의 사이는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혼 외자에 대한 차별이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차별과 무시가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거나 대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고, 직업 선택의 폭도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1466년, 법관이었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피렌체로 이주하여, 그 당시 실력 있는 예술가였던 ‘안드레아 델 베로치오’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20대 초반까지 있었으며, 이곳에서 그는 그림, 조각, 기하학, 기계, 공학 등을 배웠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대한 관심과 탐구로 가득 찼으며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제자의 재능을 알아본 베로치오는, 레오나르도를 제자가 아닌 화가로서 존중해 주었습니다.

 

피렌체에서의 경험은 그의 예술적, 과학적 탐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5세기 당시의 이탈리아 피렌체는 인구가 5만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아담한 도시였지만,

르네상스(Renaissance·14~16세기 유럽의 문예 부흥운동)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이후에도 다빈치는 밀라노, 로마, 프랑스 등에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쳤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간의 내면과 자연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을 넘어, 그의 혁신적인 기법과 창의적인 예술적 재능으로 그의 작품에 담았습니다.

 

높은 예술성과 기술력을 인정받아 세기의 명작으로 꼽히는 그의 대표작으로는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등이 있는데, 이 두 작품은 지금껏 본 적이 없던 새로운 원근법을 이용해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습니다.

 

‘모나리자’ 없이는 루브르 박물관을 논할 수 없다고 할 만큼, ‘모나리자’는 작품 속 미소의 신비로움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또한 '최후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기 전날, 열두 제자와 함께 만찬을 나누는 모습을 그렸는데, 예수와 제자들 사이의 복잡한 감정을 생생하게 담아내어, 종교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다빈치는 노트에 자연 현상과 인간의 신체를 탐구하며 수많은 스케치를 남겼고, 일기와 그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기록했습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것만도 4천 페이지가 넘습니다.

 

그는 비행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새의 날개를 연구하고, 해부학적 스케치를 통해 인체 구조를 분석하며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그는 '움직임을 유발하는 근육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면 사람을 제대로 그릴 수 없다'라고 생각했으며, 그의 인체해부도는 사실적이고 아주 정교했습니다. 이러한 연구들은 그의 예술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쳐, 인체의 해부학적 정확성을 추구하여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명암법을 통해, 인물들의 깊이와 입체감을 강조했으며, 원거리에서 물체를 둘러싼 공기까지 그림으로써, 완전한 삼차원의 세계를 그리는 대기 원근법인 ‘스푸마토’ 화법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항상 자신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쳐 새로운 아이디어로 혁신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화가일 뿐만 아니라, 조각가, 건축가, 발명가, 해부학자, 과학자로서 예술, 과학, 수학, 공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계를 넘나들며 천재성을 발휘한 인물입니다.

 

다빈치의 노트에는 비행기, 잠수함, 전차, 헬리콥터, 탱크, 권총, 낙하산, 잠수복, 방적기, 제분기 등 그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발명품들의 설계도가 있었습니다. 이 중 다수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기 때문에 실제로 제작된 것은 거의 없었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시대를 뛰어넘어 현대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1516년, 프랑수와 1세의 초청을 받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프랑스로 건너갔습니다. 어려서부터 예술과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프랑수와 1세는 이탈리아 예술가들을 프랑스로 초청하고 후원하였는데 다빈치를 특히 애정했습니다.

 

건축가이기도 했던 다빈치는, 프랑수와 1세의 사냥 별장이었던 ‘샹보르 성’을 설계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샹보르 성 중앙에는 그가 최초로 고안한 이중 계단이 자리 잡고 있는데, 내려오는 사람과 올라가는 사람이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설계하여 과학적이면서 실용성이 돋보이며,

웅장함이 특히 압도적입니다.

 

1516년 이후 프랑스에서 계속 거주하며 활동하던 다빈치는 서서히 기력이 약해져, 3년 뒤 1519년 5월 2일 그의 나이 67세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자식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그의 제자 ‘프란세스코 멜지’에게 유산을 상속하였습니다.

 

1570년 프란세스코 멜지의 죽음으로, 그가 소장하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엄청난 양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기술과 과학 그리고 예술을 하나로 융합하려고 평생에 걸쳐 창의적인 노력을 시도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대표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1472년~1475년〈그리스도의 세례〉, 1475년~1480년〈수태고지〉, 1483년~1486년〈동굴의 성모〉, 1488년~1490년〈흰 족제비를 안은 여인〉, 1490년경〈음악가의 초상〉, 1490년~1491년〈리타의 성모〉, 1498년경〈최후의 만찬〉, 1503년~1506년〈모나리자〉, 1508년경〈암굴의 성모〉, 1510년경〈성 안나와 성 모자〉, 1514년경〈세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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